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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k-암살자의 신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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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k-암살자의 신조

Mindit 2015. 10. 31. 22:06

"빨리빨리 걸어, 개자식아."

"죽을 길이라고 생각하니 떨리나?"

 굳이 이들의 비위에 맞춰줄 필요는 없지만 쓸데없는 투정을 더 듣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걷는 속도를 조금 올렸다. 입 속으로 뭐라고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재촉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겼다. 차분히 주변을 둘러본다. 경계는 철저하다. 이쪽 복도를 허락 없이 드나들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키는 병력 전원을 처리해야만 하겠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좋은 징조는 아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창문 너머를 살펴보았지만 유리의 반사광이 지나치게 밝았다. 역시 들어온 곳으로 나온다는 계획은 포기하는 게 낫겠다. 확실하지 않은 탈출구에 기댈 순 없으니까.

"멀었나?"

"네놈이 알 필요 없는 일이다, 머저리."

"곧 사라질 목숨이니 그런 말이나 지껄일 여유가 있으면,"

"유언이라도 생각해 놓겠어. 닥쳐."

 들어주기가 짜증나 말을 끊었다.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직전에 살짝 방향을 틀었기에, 별반 고통은 없었다.

"건방지군, 암살자."

 후드를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죽일까. 잠깐 스쳐지나가는 살의였지만 참았다.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그의 오른손을 붙들던 팔이 떨어졌다. 앞으로 오더니 뺨을 후려친다. 이 놈이?

"네 목숨은 우리가 쥐고 있어.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거다."

 감정을 삭이기 위해 숨을 두 번 내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지."

 놈은 씨근거리며 다시 그의 오른팔을 붙잡는다. 양 팔을 붉은 갑옷의 경비병 둘에게 붙들린 채 끌려가다시피 걸어가는 상황. 그게 에슈티어 크로우맨의 현재 상황이다.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당긴다. 다시 앞으로 걸었다.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 계단을 올라서, 다시 왼쪽, 직진. 무의식적으로 길을 암기하고 있는 자신에게 비웃음이 나왔다. 이쪽은 이미 포기한다고 정했을 텐데도 버릇이라는 게 무섭다. 계속해서 걷는다. 이윽고 그들은 한 문 앞에 멈춰섰다. 이제야 도착인가. 약간은 안도했다.

"퀸에게 전해라. 암살자가 제 발로 찾아왔다고."

 퀸? 이상하군, 여왕이라고 자칭하기에는 일개 지방의 영주일 뿐인데.

"암살자?"

 입구를 지키던 경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더니,

"이상한 놈이 다 있군."

 그렇게 중얼대고는 방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의 정적. 들이느냐 어쩌느냐를 두고 대화가 오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약간의 시간을 더 보내고,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시는데."

 드디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를 끌어당기는 팔에 몸을 맡기다시피 하며 걸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다. 기묘한 향기가 난다. 커다란 창문과 업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품질 좋은 나무로 만든 책상. 깨끗하게 정리된 종이들과 깃펜,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나디아. 성당 기사단 템플러의 그랜드 마스터이고, 그가 죽였어야 할 대상이자, 지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녀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암살자, 음, 이름이?"

"에슈티어 크로우맨."

 눈을 가늘게 뜬다.

"독특하네요. 본명인가요?"

"본명이다. 믿거나 말거나."

 으쓱해보이고는 책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그의 앞으로 걸어온다.

"나를 찾아왔다고 들었는데요?"

"응."

"용건은?"

 가만히 눈을 빛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네 밑에 들어가고 싶어."

"흐응?"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우리에 맞서는 암살단원 아니었던가요?"

"그랬었지."

"그렇다면 배신에 대한 이유도 당연히 있겠죠?"

"있어."

 그는 짧게 떠올린다. 믿고 따라 왔던 암살자의 신조에 대한 깊은 실망을. 동료들의 위선과 잘못된 사고방식에 느꼈던 깊은 절망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간결하게 전할 수 있을까? 속으로 조심스럽게 그간 그에게 있었던 일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그럼 됐어요."

 사고가 시작되려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말 때문에 정리할 수 없었다.

"뭐?"

 왜 이다지도 간단하게 수긍한단 말인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일축한 나디아는,

"하지만 나는 내 밑에 약한 말이 들어오는 건 원하지 않아요."

"말?"

 그제서야 그는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체스판을 찾아내었다.

"이곳에서 나는 퀸이에요. 뭐, 정말 여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아직 없지만. 그리고 당신은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말한 이상 나의 말이고요."

"재미있군. 킹은 어디 있지?"

"필요없어요."

 그녀는 노래하듯 말한다.

"그러니까, 암살자? 어디 한번 증명해 봐요. 당신이 강한 말이라는 걸."

 너무 쉽게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싶었다. 아직도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두 경비가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놀리고 있거나, 진심이거나, 어차피 둘 중 하나겠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는 강하니까.

 기습적으로 오른발을 들어 그의 우측에 있던 놈의 발을 짓뭉갰다.

"끄아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고통 탓에 그의 팔을 붙들고 있던 구속이 약해진다. 팔을 비틀어 빼내면서 팔꿈치로 턱을 올려쳤다. 손목을 확 젖히면서 팔을 놈의 목 쪽에 꽂아넣었다. 암살검이 튀어나오는 동시에 숨을 앗아간다. 하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왼쪽 놈은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되었는지 그의 팔을 비틀려 들었으나, 자유로운 오른손을 왼쪽 어깨 너머로 찔러넣는다. 암살검에 두 놈째.

"이, 이 놈!"

"뭐하는 짓이냐!"

"물러서십시오, 퀸!"

 방 안에 있던 경비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든다. 다섯. 어떻게든 가능한 숫자다.

"더 보여줄까?"

 나디아는 생글거리는 웃음을 조금도 잃지 않고 한 손을 들어올렸다.

"충분해요."

 나디아의 신호에 맞추어 병사들은 검을 집어넣었다.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경계하는 눈빛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상관의 신호 한 번에 칼을 거둘 수 있다라. 템플러 그랜드 마스터 나디아, 보통 인물이 아니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당신을 룩이라고 명명하도록 하죠."

"룩?"

 메이저 피스인가. 퍽이나 영광스럽다.

"그리고 그런 룩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이리 와봐요."

 나디아의 손짓에 따라 그는 그녀 가까이 다가간다. 팔찌 하나가 날아왔다. 낚아챈다.

"고풍스럽군."

 고풍스럽다기보다는 고급스럽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무심코 튀어나온 표현은 고풍스럽다는 표현이었다. 사슬로 이루어진 은 팔찌.

"어울릴 것 같네요. 해봐요."

 그 말에 그는 어떤 의심도 없이 사슬을 손목에 감는다. 그리고,

 그는 말이었다. 그의 퀸을 위한. 충성스러운 말. 모든 것은 퀸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그는 퀸을 위해 봉사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그의 신조를 배반하는

 잠깐, 이건.

 일이라 할지라도. 아니, 애초에 그에게 이제 신조란 남아있지 않다. 오직 퀸의 명령만이 절대적일 뿐. 그는 체스판 위에 놓인 룩, 메이저 피스

 에덴의 조각. 그 말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일 따름이다. 퀸을 위해 봉사한다. 그 이외의 목적은 필요없었다. 모든 것은 퀸을 위하여. 그는 영광스러움을 느꼈다. 비로소 에슈티어 크로우맨은 그의 퀸을 찾아냈

 그랬군. 그런 거였어.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다. 이제 그의 목숨은 어디에 쓰이더라도 상관없다. 한때는 암살단을 위해, 그의 신념을 위해 쓰였던 칼날이 이제는 퀸을 위해 쓰이게 되리라.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모든 것은 퀸을 위하여.

 에슈티어 크로우맨의 저항은 끝났다.

"나의 룩?"

"듣겠어, 퀸."

"당장 명령을 전달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네. 암살단이 널 찾겠지? 적당한 곳에 숨어있으면 이 쪽에서 연락하도록 할게. 지금은 잠깐 쉬고 있어."

"그러지."

 짧게 대꾸하고는 그는 천천히 창문을 향해 다가섰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나무와 덤불. 높이는 대략 7미터 정도 될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반지도 줄 테니 그걸 병사들에게 보여줘. 길 열어줄 거야."

"그쪽으로 가고 싶지는 않군."

 열린 길이라고 해도 한번 포기한 곳이다. 그닥 그쪽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응? 그럼 어디로 가게?"

"퀸."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응?"

 손으로 창틀을 잡고 단숨에 힘을 주어 창틀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 길은 어디에나 있어."

 그리고 그는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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