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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기사

Mindit 2015. 12. 1. 18:52

 여기가 예의 그 저택인가. 에슈티어 크로우맨은 짧게 중얼거리고 허리춤에 꽂아놓은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S&W M500. 45.7cm라는 리볼버에 걸맞지 않은 부적합한 크기와 절망적인 휴대성을 가진 총이다. 휴대용 병기라는 권총의 장점을 버린 대신 권총이라는 병기가 낼 수 있는 화력의 한계점을 넘어선 총이기도 하다. 종족 자체의 유리함을 포기하고 종족의 한계를 넘었다……. 어쩐지 원숭이 중 일부가 나무를 타기 편한 손을 포기하고 도구를 다루기 위한 손을 얻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사뭇 감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가 이 총을 가지고 온 것은 감성적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오늘 그가 싸워야 할 존재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마음 속으로 '그것' 이라고 이름붙여둔 그것은, 아마 뱀파이어의 수호자이겠지. 정확한 정보는 없다. 인간은 아닐 거라는 정도. 그 이외에는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방문했었던 정신병원을 잠시 떠올린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미쳤다. 특히 저택에 대해 떠올릴 때, 특히 '그것'에 대해 떠올릴 때. 눈은 과거를 응시했고 말들은 조각이 되어 부서져나갔다. 여성이라는 것 같기도 했고 괴물이라는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이라고 말했으면서도 곧이어 흡혈귀라고 말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뭔가' 였다.

 결국 확실한 것은 단 하나뿐. 위험하다는 거다. 결국 에슈티어 자신도 가져올 수 있는 병기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으로 챙겨오는 수밖에 없었다. 정체모를 것에는 정체성 없는 무기로. 담을 타넘고 펼쳐진 정원길에 뛰어들었다. 신경을 극한까지 곤두세운다. 풀잎 하나 흔들리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애초부터 왜 이런 의뢰를 받아들였는가.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데도. 삶에 의욕이 없어서? 말도 안 된다. 삶이 지루해지던 참이긴 하지만 삶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 왜일까. 모른다. 작은 후회를 안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흔들림. 지나가는 돌풍인가. 이성은 그리 판단하지만 조금의 여유도 없는 정신은 그의 고개를 뒤로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없다. 잠시 동안의 침묵과 응시, 조심스러운 관찰. 지나가는 돌풍이 맞았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심하지 않는 것은 좋지만, 벌써부터 여기에 집중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숨을 두어번 고르고 다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저택의 문 앞에까지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 문을 여는 바로 그 순간부터가 정말로 집중해야 할 때가 될 것이다.

 에슈티어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피했다.

 문고리를 누르듯 기대어 피해낸 총알이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공격.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밀어내며 추진력을 얻어 달린다. 층계참으로 몸을 날렸다. 총격은 분명 위였다. 2층의 난간, 누구인지 정확히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격은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 난간 바로 아래쪽으로 이동하면 난간에서 공격하는 건 더 못하겠지. 권총을 꺼내들고 상대방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체스와도 같다. 난간에서 대기하다가 사격. 회피 후 난간 아래로 대피. 그렇다면 상대의 다음 수는?

 머릿속으로 대국을 가늠해보던 에슈티어의 앞에 터무니없는 수가 떨어졌다. 더 정확하게는 터무니없게도 사람이 떨어졌다. 그제야 상대를 확인한다. 2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 난간에서 곧장 몸을 날려 떨어져내려온 거다. 잠시 경악했지만 곧장 사격으로 이었다. 상당히 정확하게 조준하고 쐈다고 생각했지만, 빗나갔나. 혀를 차고는 층계참을 오른다. 총성이 이어진다. 수 싸움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이젠 없게 되었다. 난전이다. 

 그 상황에서 난간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한다? 제 정신은 아니다. 이외의 수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굳이 예측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수를 쓴다. 따라 올라오는 상대를 향해 총을 두어 발 쏴갈긴다. 몸을 굴려 피해내는 동작. 보통 민첩한 게 아니다. 지척까지 치달아온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총격전은 관두자는 건가. 옆으로 리볼버를 던져 버리고 양손을 치켜들었다. 근접전이라면 오히려 이쪽에서 환영이다.

 날아드는 훅을 반 보 뛰어서 피한다. 오른손을 내리고, 단숨에 올려친다. 주먹이 정지하는 것과 동시에 턱에 맞부딪힌다. 정타. 놀랐다. 반사적으로 올려치면서도, 어퍼컷 같이 격한 공격이 먹혀들거라고 생각치 않았다. 다음 순간 깨닫는다. 정타를 넣은 게 아니라, 정타를 넣는 것을 허용당한 거다. 손목을 억세게 붙들리고, 훅을 날린 손이 회수되며 그의 목을 붙잡는다. 느껴지는 완력에 놀라는 것도 잠시, 붙들린 손목을 힘껏 세 번 올려쳤다. 턱에 세 번, 보통 타격은 아닐 거다. 목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고 머리를 부딪는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친다. 가벼운 미소. 같잖다는 듯한 표정이다. 

"끝났어?"

순간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직감에 급히 붙들린 손을 빼내려 하지만, 윗팔뚝을 잡아채는 동작에 이내 깨닫는다. 빌어먹을.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완전히 몸을 밀착시켜온다. 에슈티어는 숨을 들이켰다. 무중력을 느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는 바닥에 내팽겨쳐졌다. 낙법이고 자시고 붙들린 채로 휘둘러지는데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의 손에서 번득임이 일어난다. 굴러서 빠져나가자니 팔뚝은 아직도 단단히 붙잡힌 채고, 이제는 무릎에 체중까지 실어 탈출을 봉쇄한다. 가슴께에 느껴지는 중압감,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는 칼날. 손목을 잡아챈다. 지근거리에서의 힘싸움. 힘껏 뿌리쳐냈다. 칼날도 바닥에 나뒹군다. 인간의 상징인 도구를 일체 버린, 원시 그대로의 육탄전이 되었다. 기세를 몰아 목으로 손을 날린다. 뱀처럼 목을 문 손이지만, 단검을 쥐었던 손은 이제 자유롭다. 두 번째의 힘싸움. 자세의 불리함이 크다. 허망할 정도로 쉽게 그의 손은 목을 놓아버린다. 얼굴에 느껴지는 충격. 두 번, 세 번. 더는 위험하다. 다시 날아드는 손을 쳐내고 머리채를 붙잡아 다시 한 번 박는다. 눌려 있던 몸을 간신히 빼내며 굴러 일어났다. 격렬한 저항에 저쪽도 튕겨나갔지만, 한 번 구르고는 잽싸게 몸을 일으킨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깔끔한 낙법이다. 이렇게 지저분하게 싸워보기는 또 처음인데. 짧게 중얼거렸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반면 저쪽은 그 자세 그대로다.

"에슈티어 크로우맨."

"카다시안 제너. 벌써 지쳤나봐?"

"이 정도로?"

 짧게 통성명을 끝내고, 이번에는 이쪽에서 달려든다. 선공은 취향이 아니지만 이대로 저 여자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왼팔꿈치로 밀어친다. 리치가 짧은 공격, 저쪽은 거리를 벌리는 것으로 응대한다. 이 거리에서 날아올 공격이라면? 손을 어깨 높이로 치켜들었다. 예상대로. 뒤로 몸을 젖히면서 비틀어진 몸의 균형을 이용해 단숨에 돌려차기. 생각보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다. 흘려냈다고 생각했는데, 타점이 다르다. 싸우는 스타일은 분명 막싸움인데, 말이 나오지 않는 수준의 예리함이다. 타고난 재능인가, 아니면. 갈고리처럼 걸어오는 공격에 버텨내며 앞으로 두 발. 왼손으로 훅을 날린다. 평소와는 다르게 발 기술보다 손 기술을 많이 쓰는 기분이다. 빠르게 고개를 비트는 것이 보였다. 정타는 아니다. 이어지는 공방. 무릎, 옆구리를 내 주었다. 얼굴로 뻗어오는 주먹, 위험하다. 그녀가 했던 대로 고개를 젖혀 비껴냈다. 역공, 팔꿈치로 베어내듯 올려치고, 도끼날처럼 찍는다. 팔꿈치는 날붙이라고 생각해라. 오랜만에 떠올리는 말이다. 쇄골에 정타. 유효했나. 목에 그럭저럭 타격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카다시안은 웃는다. 

"이게 전부야?"

 그 웃음 속에, 분명 스물 남짓한 여자의 얼굴 속에서 그는 노장의 여유를 보았다.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역시 단순한 인간은 아니다. 뭔가가 있다. 그 뭔가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정의할 말을 찾아본다. 짐승의 그것과도 닮았고, 싸움꾼의 그것과도 닮은, 그래, 광기. 타격을 입어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싸움을 즐기는 광기가 있다. 무엇이 그토록 다른 침입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는가. 이 광기다. 흡혈귀의 수호자. 에슈티어보다 날카로운 전투 센스는 경험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부딪혔으니 멍쯤은 들어있어야 맞는데, 맞은 흔적이 없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타격이 없었거나 그 사이에 회복했거나. 전자라면, 실은 에슈티어가 어떤 공격을 시도하든 전부 내주고 단검으로 그의 심장을 찌르기만 하면 충분했을 터다. 아프지 않은데 비틀거릴 리 없고,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공격을 흘려낼 리 없다. 그렇다면 치유력이다. 뱀파이어의 특성과 비슷할까. 이제서야 깨닫는 말의 조각들이다.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흡혈귀인 것 같기도 하다. 여성인 것 같기도 하고, 괴물인 것 같기도 하다. 카다시안의 눈에서 늑대의 흉포함을 보았다. 총격전으로 싸웠다면 자기 신체부위 몇 곳을 넘겨주면서까지 에슈티어를 끝장냈겠지. 오래 싸웠다간 유리하지 않다.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다.

"아직이다."

 몸의 반응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달려들어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는다. 평소라면 클린치로 연결해 무릎으로 찍기 공격을 시작하는 연계의 기본이다만, 이번에는 목적이 다르다.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잡혀주더니 그대로 팔목을 쥐어온다. 완력 대결. 있는 힘을 모조리 짜낸다. 분명히 아까 단검을 들고 싸울 때보다 강해졌다. 아니, 아니다. 에슈티어가 지쳐가는 증거다. 카다시안은 아직 지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끌었으면 확실히 죽었겠군. 오랜만에 전율이 목을 타고 흐른다. 모든 정신력을 짜내어 그녀의 목을 비튼다. 짧은 순간 생기는 거대한 빈틈. 이 와중에서도 카다시안은 작게 웃었다. 타격점을 최대한 짧게 잡고, 명치를 향해 주먹. 얼굴을 내려찍듯이 반대편 팔로 팔꿈치. 몸을 허공으로 날려보내듯, 무릎으로 얼굴을 걷어찬다. 카다시안의 몸이 크게 휘청인다. 방금의 공격으로 있는 체력을 다 날렸다. 우악스럽게 그녀를 밀쳐 넘어뜨리고는 몸을 뒤로 날려 총을 찾는다. 어디, 어디다 뒀더라? 간신히 은빛 총신을 발견하고 붙잡는다. 구르며 쓰러진 그녀를 향해 겨눈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낙법은 그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시전되었는지, 쓰러졌어야 할 그녀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입술을 깨문다. 카다시안은, 웃으며, 마찬가지로 그를 겨누었다.

 그리고, 두 발의 총성.

-

 나디아는 웃는다.

"그래서 넘어졌었다고요?"

 카다시안은 변명하듯, 혹은 타이르듯 애절한 투로 말한다.

"하나라서 봐 줘 가면서 싸웠다니까."

"그래요?"

 나디아는 다시 웃고, 카다시안은 믿어주지 않는다는 반응에 억울해 가슴을 친다. 나디아는 그 모습을 보고 유쾌한 듯이 한참을 깔깔거리고, 카다시안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한참 더 즐기다가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키고 말한다.

"아니에요, 믿어요. 나의 기사인걸요. 고작 침입자 하나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다곤 생각 안 해요."

"그럼. 퀸, 나 속상할 뻔 했다고."

"자, 그럼 뽀뽀."

 안심하고 미소짓던 카다시안의 얼굴은 흙빛이 된다.

"꼭 해야 해?"

"어머, 그 사이에 내가 싫어졌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뽀뽀."

"퀴, 퀸."

 궁지에 몰린 카다시안은 필사적으로 말한다.

"싫어요?"

"아, 아니. 그보다는 일단 시체부터 치우고 마저 이야기하자. 그, 무드가 안 살잖아?"

"흐응?"

 나디아는 눈을 휘어 웃더니, 늑대의 변명을 한 번은 들어준다는 투로 대답했다.

"뭐, 좋아요. 대신 치우고 나서 확실히 이야기하자고요. 알았죠?"

"으, 응."

"그리고, 룩?"

"듣고 있어."

"당황하진 않았죠?"

 샐샐 웃으며 물어본다. 이 장면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당황했다고 해야지. 하지만 이 풍경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퀸은 나이트를 놀려먹고, 나이트는 당황한다. 싸울 때 느꼈던 것과는 다르게, 뭐랄까. 올곧으면서도 비틀어져 있다고 할까. 물론 퀸으로 말하자면 그냥 비틀어져 있다. 그런 동시에 그 비틀어짐 자체를 절대적 규칙으로 성립시킨다.

"딱히. 볼 만큼 봤다는 느낌이야."

 담담하게 대꾸했으나 퀸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요? 그럼."

 제 뺨을 톡톡 두드리는 그녀를 보고 에슈티어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