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모음
변하는 사랑을 위하여. 본문
"오, 오늘이 100일이야? 하하, 아메 군 고민이겠네."
대답은 날카로웠다.
"… 남 뒤로 와서 몰래 휴대전화나 훔쳐보는 거 하지 마세요."
"무슨 섭섭한 말씀을… 나는 갑자기 아메 군이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더니 굳어버린 것 때문에 손도 흔들어 보고, 불러도 보고, 박수도 쳐 보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박수를 쳤다니, 그 무슨.
"… 분명 박수치는 부분은 거짓말입니다. 다 듣고 있었어요."
"다 듣고 있었으면서 무시한 거야?! 으음, 이건 좀 충격……."
충격 받았거나 말거나. 야마다 아메는 단지 그의 노력에 반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을 뿐이다. 평소라면 뭐 하는 거냐고 태클이라도 걸어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도, 기분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서, 뭘 할지는 정했어?"
"시끄러워요."
"못 정했구나."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무 준비도 없이 100일을 맞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99일 밤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뒤척이며 잠든 이후로 야마다 아메는 반쯤 의식적으로 오늘이 무슨 날인가 머릿속에서 지우고 생활해야 했다. 보건위원 직무에 문제가 생기니까. 하지만 방금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말았고, 결국에는 의식적으로 지우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적당히 반지라든가?"
"이미 준비했어요."
은 반지로.
"뭐야. 못 정한 게 아니네? 아메 군 거짓말하면 천벌 받아, 천벌."
"당신이 아직까지 잘 살아있는 걸로 봐서 아닌 것 같네요."
"… 윽."
그와 대화중인 상대는 오오야마 시오. 본인 말로는 가명이라는 모양이다만은, 일단은 초고교급의 점술가다.
"이봐이봐, 나 정도는 좀 봐 달라고, 아메 군. 원래 점쟁이가 항상 사실만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가 초고교급의 거짓말쟁이인 것은 아니다. 단지 직업 특성에 따라 거짓말을 할 상황에 자주 직면할 뿐.
"… 시답잖은 잡담은 됐어요. 그보다 나는, 이걸 뭐라고 하면서 줘야 할지. 그게 걱정이라고요."
아무 무늬도 없는 은반지, 커플 세트. 왼손 약지가 아닌 오른손 약지에 끼울 생각이었다. 아이텐의 왼손 약지는, 응.
"뭐라고 하면서 줘야 할지?"
오오야마는 그 말을 듣더니,
"큽. 크흡. 크, 크흑, 푸흡, 푸흐흐, 아메 군 다운, 크큭, 푸흐흐흡. 후우, 하아. 아메 군 다운 걱정이네."
"… 더 웃으면 화냅니다."
그 말에 오오야마는 전혀 두렵지 않다는 눈치였지만 얼굴에서 웃음기는 거두었다. 예의는 잘 차리는 남자다.
"아메 군은 늘 화내고 있다고. 뭐, 글쎄.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할게요, 이런 말 로맨틱하지?"
"변치 않는 사랑이요?"
야마다 아메는 그를 올려다본다. 변하지 않는 사랑? 그런 말을 들어봐야 당혹스러울 뿐이다. 아메는 다분히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답한다.
"변치 않는 사랑같은 걸 내가 줄 거라고 생각해요?"
-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야마다 아메는 결국 노 플랜으로 방과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참혹한 심정이었다. 아이텐이 몇 번 보건실에 찾아오기는 했지만, 반지는 미처 건네주지 못했다. 그보다 아이텐은 그닥 기념일이라는 걸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 괜히 호들갑떠는 게 아닐까. 카에데는 기념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그건 스즈키 카에데 본인만의 기준이 아닐까.
어쨌든 야마다 아메나 나츠모리 아이텐이나 연애에 있어서는 생판 초짜인데다, 서로의 마지막 연애이기도 할 것이다. 뭐가 맞고 뭐가 그른지 알아볼 수는 없다. 아메는 한숨을 잠깐 내쉬었다가, 그에게 반지를 사라고 충고했던 장본인인 스즈키 카에데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1학년 반에 가서 아이텐에게 보건실에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라는 정도. 아이텐에게도 슬슬 휴대전화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본인이 필요성을 느끼기 전까지는 굳이 사라고 재촉할 필요가 없을 거다.
그리고 잠깐의 기다림.
"아메쨩! 불렀어?"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야마다 아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당히 다급하게 내려온 듯 옷가지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봐야 계단에서 뛰어내려올 수 없는 몸이니 걸음을 서두른 정도겠지만…
"아이텐, 급하게 다니지 말아요. 넘어지면 크게 다칩니다.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면 아메쨩과 24시간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할 말이 궁색해졌다.
"그래도 좀 신경쓰라고요, 진짜. 내가 여친님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요?"
이번에는 아이텐 쪽에서 할 말이 궁색해진 듯, 그녀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메는 다가가 옷매무새를 톡톡 쳐서 정리해주었다.
"그런데 왜? 아메쨩이 이렇게 나 부르는 건 처음이네?"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아이텐을 호출하는 것은 처음이다. 카에데에게는 내가 네 심부름꾼이라도 되는 줄 아냐고 잔소리를 좀 먹기도 했으니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부터는 직접 가서 불러야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뭐. 뭐 저기, 음."
여전히 뭐라고 하면서 반지를 건네야 할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메는 안절부절못하고, 그런 그를 아이텐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뭐라고 말해야만 한다. 뭐라고 말해야만 한다. 뭐라고 말해야만 한다!!
"아메쨩?"
"흐앗!!??!?!? 그러니까반지준비했으니까받으라구요!"
"… 반지?"
"…………."
목 뒤로 식은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너무 놀란 나머지, 가장 최악의 형태로 반지를 전해주게 생겼다.
"와아, 반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아이텐의 눈은 반짝반짝하고 빛난다. 어떤 형태로 전해주든 기뻐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메의 기분의 문제다. 완전한 형태로 전해주느냐, 이딴 식으로 전해주느냐 하는 건 체면이라는 차원에서 격을 달리하는 거다.
"… 좀 더 멋진 대사를 하면서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쩌나. 이미 반지가 있다는 걸 이실직고해버린 걸. 아메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아이텐에게 반지함을 건넸다.
"후후. 아메쨩이 주는 선물이라면 무슨 대사를 해도 기쁜 걸! 헤에, 그렇구나… 난 아메쨩을 선물로 받아버리고 싶었는데."
반지를 감상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뱉는다. 당혹스러웠지만 아메는 주머니에 넣어둔 또 하나의 반지를 제 오른손 약지에 끼웠다.
"… 원래 이런 커플 반지는 왼손 약지에들 끼우죠. 왜 그러는지 알아요?"
아이텐의 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무시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왜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왼손 약지에 심장에 바로 통하는 혈관이 있다고 믿었다, 라고 해요. 그래서 약속의 상징인 반지는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걸쳐두기로 한 거죠."
"정말? 난 그런 생각은 못 해 봤는데… 아메쨩 역시 유식해……."
"… 나도 얼마 전에 아는 사람한테서 들은 거예요. 그치만 어차피 그런 거 미신이고, 난 오른손에 낄래요. "
아이텐은 이내 웃는다.
"그래, 오른손이 좋겠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배려이고, 그걸 눈치챘다고 고마워할 필요도 없는 배려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약간은 서글프지만 기쁘게.
"… 있죠, 아이텐."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응?"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이제 없다. 이미 건네준 뒤니까. 부담감을 놓아버리고서야 뭔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무슨 모순인지.
"실은 이 반지를 주면서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합니다, 하는 말을 해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더라고요…?"
미심쩍은 듯 갸웃하는 아이텐.
"그런데 난, 솔직히 말하자면 변치 않는 사랑같은 건 약속하지 않을 겁니다."
"에?! 으, 응? 왜?"
아이텐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지만, 아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일 뿐이다.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라는 말도, 약속하지 않겠다는 말에 당황하는 모습도.
"흐르지 않는 강물을 본 적이 있나요, 아이텐? 물이 흐르지 않으면 고여서 썩어요. 변하지 않는 사회를 본 적이 있나요? 그런 사회는 부패해서 무너질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건 정신병의 일종으로, 최대 6개월 정도 지속된다고 해요.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병은 6개월 후에 낫는 겁니다. 앞으로 세 달 가량 남았을까요."
"… 아메쨩?"
아메는 미묘한 격앙을 느꼈고, 아이텐 역시 그런 아메를 조금은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전부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니까 난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지 않아요. 그런 건 썩어서 사라질 사랑입니다. 나는 변하는 사랑을 할 거예요. 날마다 당신에게 새롭게 반해가고, 또다른 사랑이 싹터요.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새로운 사랑을 느끼고 있어요. 나의 사랑은 변해요. 당신을 향해서 언제나 다른 방향으로 변할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텐."
잠깐의 침묵.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이텐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고,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아메 역시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보건실 틈새로, 겨울의 이른 노을이 스며들기 시작하며 보건실을 붉게 물들였다. 이제는 얼굴뿐 아니라 모든 것이 붉었고, 둘은 그렇게 찰나의 시간 속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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